보다 효과적인 영어 교육을 위해 이중언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찮다. “영어가 모든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주장이다. 영어의 필요성이 지나치게 침소봉대(針小棒大)됐다는 입장이다. 서울대 영어교육과 이병민 교수는 “영어가 글로벌 언어이기 때문에 집중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 사회 곳곳에 포진한 영어가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상화된 영어를 깨뜨리고 영어의 거품을 걷어내야 제대로 된 영어 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도시 국가나 작은 규모의 나라라면 몰라도 인구 7000만~8000만의 국가가 교육을 통해 의도적으로 이중언어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과연 전 국민이 영어 잘할 필요 있나 수요조사도 안 한 채 필요성 침소봉대
지난 11월 19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이병민 교수를 만났다. 그는 우리 사회의 영어 환경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이중언어를 말할 때, 해당 언어는 그 사회의 일상생활에서 쓰여야 합니다. 한국어와 영어의 이중언어 교육이라면 영어를 안 쓰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전제돼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영어를 못한다고 살지 못할까요? 단일어 배경을 가진 우리는 가족과 사회에서 배운 모국어만 가지고 평생을 살아도 그다지 어려움이 없는 언어 환경입니다. 그런데 국민들은 영어가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언어라고 믿습니다. 언어 사용 환경이나 영어에 대한 수요, 필요성을 고려하면 영어 능력은 일부에게만 필요하지만 인구의 대다수가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길 바랍니다. 모두 영어에 필요 이상의 가중치를 두고 침소봉대한 결과입니다.”
▲ 지난 2006년 토플 시험방법 변경을 앞두고 원서접수를 위해 장사진을 친 예비 수험생들. / photo 조선일보 DB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당대·2007)에 수록된 그의 글(영어교육, 어떤 새로운 옷을 입혀야 하나)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속칭 기러기 아빠의 출현은 사교육에서 진행되는 영어교육 실험의 극단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필리핀 파출부를 고용하는 것에서부터 영어 원어민들이 가르치는 취학 전 어린이 영어학원, 원정출산을 통한 미국 시민권 취득 및 외국인 학교 입학, 영어권 국가로의 조기유학, 원어민을 통한 전화영어, 방학을 이용한 미국·캐나다·뉴질랜드·필리핀 등에서의 단기 영어 연수….’
이 교수는 국가고시를 비롯 대부분의 인력 선발 시험에서 영어가 도입되고, 일부 대기업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며 승진 심사에서 영어 능력이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인정되는 현실이 바로 영어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현실적인 힘으로 작용하며 삶의 여러 관문에서 중요한 ‘게이트키퍼(gatekeeper)’ 역할을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영어에 덧씌워져 있는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영어 우상화를 깨뜨려야 합니다. 영어가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실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영어 교육의 목표를 정하고 영어의 필요성에 대한 과장된 이데올로기를 심고 있어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용이 투자되고 손실이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이 교수는 초등학교 조기 영어교육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면서, 학교 영어 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영어에 노출되는 전체 교육 시간과 집중도(intensity)라고 강조했다.
“현재 초·중·고의 전체 영어교육 시간은 730시간 정도입니다. 대학 입학 전 학생들이 음성 영어(듣기와 말하기)에 노출되는 시간은 200시간도 채 되지 않습니다. 하나의 언어를 어느 정도 유창하게 구사하려면 적어도 2000~3000시간 정도의 집중적인 노출이 필요하지만 우리 학교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겁니다. 그것도 일주일에 조금씩 시간을 나눠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을 똑똑 떨어뜨리는 방식(drip feed)’으로 이뤄집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미국 FSI(Foreign Service Institute)의 예를 들었다. “외교관에게 한국어를 교육시키는 데 2400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하루에 6시간씩, 원어민 강사가 5~6명 정도의 소그룹을 대상으로 1년 내내 집중적으로 교육시킬 때 그렇다는 얘깁니다. 30여명의 아이들에게 일주일에 1~2시간 가르쳐서몇 년이 지나야 그 정도 수준에 도달하겠습니까.”
초·중·고 영어수업 합해야 730시간뿐 중요한 건 교육시간 증대와 내용의 충실도
그는 최근 초등학교 1·2학년에 영어 교육을 도입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늘어나는 영어 수업은 30여시간에 불과한데, 하루 8시간씩 진행되는 영어마을 프로그램에서 나흘이면 충분한 교육 시간을 2년 동안 물방울처럼 조금씩 떨어뜨려 주었을 때 어떤 효과가 나타날지는 불 보듯 뻔하다는 것이다.
대안은 무엇일까. 그는 우리 교육은 초·중·고 교육에만 밀집돼 있다면서 영어교육은 대학까지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전공에 따라 대학과 대학원에서 강도 높은 영어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4년 동안 영어 몰입식 교육을 하면 확실히 성과를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영어 관련 학과와 경영학과에서는 학부에서부터, 자연과학과 공학 분야에서는 대학이나 대학원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가르쳐도 필요한 영어는 충분히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말하기 위주의 교육에 대해서도, 그는 읽기 능력을 바탕으로 영어로 된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능력(English electronic literacy)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몇 마디 생활영어를 할 줄 아는 것보다 영어로 된 정보를 다루는 능력을 대학에서 제대로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조기 영어교육의 이론적 근거가 된 ‘결정적 시기 가설(critical period hypothesis·일정한 나이가 지나면 영어를 배우기가 어렵다는 주장으로 the earlier, the better로 요약된다)’은 그야말로 가설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결정적 시기 가설에 대한 논문은 하나같이 미국 이민자를 대상으로 한 것입니다. 몇 살에 영어권 국가에 왔는가(age of arrival)가 변수죠. 코끼리 비스킷만큼 영어에 노출시키는 우리의 영어 환경에서 언제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는 논의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8세와 10세에 같은 시간 학교에서 영어 교육을 시켰을 때 누가 잘 배웠을까요. 스페인 바르셀로나대학에서 나온 논문은 10세가 8세보다 훨씬 잘한다는 결과를 보여줬습니다. 8세 아동에게는 400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10세 아동에겐 200시간만 해도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죠.”
그는 1만1680시간의 법칙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하루 8시간을 꼬박 영어에 몰두하면 4년 안에 성과를 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하루에 투자하는 시간이 4시간이면 8년, 2시간이면 16년, 1시간이면 32년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시간은 늘어난다고 했다.
자유롭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려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이 교수는 학교 단위의 개별 영어 시험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대입을 목표로 과도하게 벌어지는 영어 교육의 무한경쟁을 줄이고 학교 현장의 영어 교육이 왜곡되는 현상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대학에서도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해 도달 가능한 일정 수준만을 요구하고, 이 기준을 통과한 학생이면 별도의 영어 시험 없이 대학 입학 조건을 충족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 이상에 대해서는 대학이 전공별로 필요에 따라 교육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